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성곽.)
동의어 광주풍납리토성, 풍납동토성, 풍납토성 다른 표기 언어 ─風納洞土城
시대 : | 고대/초기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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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 | 사적 제11호 |
건립시기 : | 초기백제 |
성격 : | 토성, 백제토성 |
유형 : | 유적 |
면적 : | 지정면적: 12만 1325㎡ |
소재지 : |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72-1 외 |
분야 : | 역사/선사문화 |
↓ 풍납토성
풍납토성(風納土城)은 서울 송파구 에 위치한 토성 유적으로, 정식 명칭은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이다. 풍납토성이라는 명칭은 풍납리일대의 토성이라는 뜻에서 온것이며 ,
정확히 조선시대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古山城)" 이라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중세인들도 백제의 오래된 성곽이라 추측한것으로 추정된다 .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1900년대 학계에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공사를 계기로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전철 5,8호선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면 풍납 근린 공원이 있고 우측 편으로 흙으로 쌓은
풍납 토성이 나온다.
↓ 토성의 가운데가 잘라져 훼손 되어 주택이 지어져있으며, 이구간을 지나면 다시 토성이 나온다.
유적조사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쪽벽이 허물어지면서 삼국시대 전기의 청동제 초두(炒斗)
2점이 발견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4년 10월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팀에 의하여 발굴되
었다.
발굴 결과 이 토성의 성벽은 판축(版築: 돌을 판판하게 깔고 위에 흙을 다지는 것)방법을 사용하여
고운 모래로 한 층씩 다져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축성방법은 돌이 별로 없는 중국의 평야지
대에서 성을 쌓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이것이 백제에 전해져 풍납토성·몽촌토성(夢村土城)을 비롯
하여 백제의 성곽이나 목탑기단 축조에 주로 이용되었다.
이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한강에 연한 평지에 축조된 것으로,
초기 백제의 국도(國都)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
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특히, 동벽에는 거의 같은 간격으로 네 군데가 크게 뚫리어 외부로 통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축성
존재하던 성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토성의 연대는 『삼국사기』에 있는 286년
(책계왕 1)의 사성(蛇城)의 기록으로 보아 3세기 후반이 가장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토성의 발굴조사에서는 풍납리식무문토기(風納里式無文土器)·조질유문토기(粗質有文
土器)·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신라식토기(新羅式土器)·풍납리흑도(風納里黑陶) 등의 토기와
도제(陶製) 그물추·물레가락바퀴[紡錘車]·개와(蓋瓦)·철편(鐵片)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축조가 백제 건국 초기(서기전 18년)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 토성은 고고학적 발굴조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1세기경에 만들어
져 475년(문주왕 1)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이 옮겨질 때까지 5백여 년간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이처럼 백제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이 성의 사용 목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문헌비고』에 나오는 평고성(坪古城)을 풍납리토성에 비정하고 이것을 『삼국사기』백제
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
했던 사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성은 풍납토성이 아니라 이성산성(二聖山城)을 주성(主城)으로 하여 방사선상으로 축조
되었던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선동 부근에 위치한 토성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1997년선문대학교 풍납토성 학술조사단에 의해 실시된 실측조사에 의하면 성벽의 너비는 30∼40m
정도이고, 가장 넓은 곳은 70m에 이르며, 복원된 북벽의 높이는 11.1m, 미복원된 남쪽과 동쪽의
높이는 6.2m 내지 6.5m 정도로 보고되어 있다.
풍납토성은 을축년(乙丑年, 1925) 대홍수 시 청동제 초두, 과대금구(銙帶金句) 등 중요 유물이 출
토되면서 일제강점부터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되는 등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다가 1964년 서울대
학교가 최초로 성내 유물포함층을 시굴조사하여 백제시대의 생활면 2개층과 풍납리식무문토기를
비롯한 기원 전후∼5세기대의 유물을 확인하고 하남 위례성과 동시기에 축조된 반관반민적(半官半
民的) 성격의 읍성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 후 이렇다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토성 내부의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되었는데, 1997년 1
월 풍납토성의 성벽 실측조사를 실시하던 선문대학교에 의해 풍납동 231-3번지 일대의 아파트 재건
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토기 등 유물 다수가 출토된 사실이 제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 발
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풍납토성에서 실시된 최초의 본격적인 발굴조사에서는 서기 전후의 소위 경질무문토기가 주로 출토
되는 3중의 환호유구와 평면형태 6각형에 20평 내외의 큰 규모를 보이는 초기 백제시대 집자리
19기, 토기가마 1기, 기타 토기산포유구 4기 및 수혈유구 40여 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밝혀줄 만한
중요한 유구들과 토기, 기와, 철기 등 실로 방대한 양의 초기 백제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발굴조사를 계기로 풍납토성 내부에 대한 사전조사가 의무화되어 아파트 재건축에 따른 시굴조
사 및 발굴조사가 이어졌고, 그 중에는 1999∼2000년 한신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초대형
‘여(呂)’자형 건물터 및 ‘대부(大夫)’명 토기편 등이 출토된 경당연립 재건축부지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풍납토성 내부에서 중요한 성과들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풍납토성의 복원사업계획에
의거 학술 및 복원·정비의 기초자료를 획득, 활용을 목적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지점은 1997년에 발굴조사 한 지역에 연결되는 동벽 2개 지점을(북쪽 A지점, 남쪽 B지점)
동∼서로 절개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실시하였다.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우선 가장 하단에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하부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 중심토루를 쌓았다. 그리고 나서
안쪽으로 사질토(Ⅱ토루)와 모래(Ⅲ토루), 점토다짐흙(Ⅳ토루)과 뻘흙(Ⅴ토루)을 위주로한 판축토
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쌓았다. 그 중 마지막 토루 상면에는 강돌[川石]을 1겹씩 깔아 3단으로 만
들고, 그 안쪽으로는 깬돌[割石]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석렬 및 석축은 토사의
흘러내림과 안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배수의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3단의 강돌렬 사이에 의도적으로 돌을 깔지 않고 배수홈을 낸 것에서 뒷받침된다.
한편 A지점의 경우에는 뻘흙으로 이루어진 Ⅴ토루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의 식물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여 겹 이상이 확인되는데, 뻘흙을 10㎝ 정도 두께로 부은 후 식물유기체를 얇게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토루를 쌓아 올린 것이다. 이러한 축조
방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고, 일본의 수성(水城)을 비롯한 제방유적
에서도 확인되어 고대 한국과 일본의 문화 전파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식물유기
체 4∼5겹에 한번씩 3단에 걸쳐 성벽의 횡방향으로 각재목을 놓고 수직목을 결구시켜 지탱한 구조
물도 확인되었는데, 종간격 1.1m 정도로 8렬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목재는 후대의 판축틀과도
유사한 구조로 보이나 현 상태로서는 목심의 역할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B지점에서는
Ⅴ토루 하단부 4단째의 석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성벽의 종방향을 따라 0.8m 간격의 수직목이
확인되기도 하여 구획선임을 추정할 수 있다.
중심토루 외벽으로는 경사지게 떨어지는 자연층 위에 판축법으로 토루를 쌓고, 내벽과 마찬가지로
상부에 할석 또는 강돌을 깔아 마무리하였다. 내벽과 외벽의 석렬은 중심토루로부터 거의 동일한
거리에 축조되어 있어 당시의 계획된 축성 의도를 볼 수 있다. 이상 확인된 규모만 보더라도 성벽
의 폭이 약 40m, 높이가 9m가 넘는 규모이고, 조사 구간이 협소하여 내외부로 확장하여 조사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하부로 내려가면서 그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출토유물은 가·나지점 성벽 하단부에서 동일하게 출토된(기원 전후에 출현하여 3세기를 전후
한 시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판단되는) 고식(古式)의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를 비롯하여 판
축토 내부에서 출토된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흑)색 무문양토기 그리고 토루 상단부와 퇴적
토와의 경계에서 출토된 장란형토기, 동이편 등이 있다.
토루의 축조방식은 그 판축법에 준하는 다소 원시적인 기법으로 흙을 쌓아 올렸고, 그렇게 쌓아 올
린 각 토루들이 중심 토루쪽으로 일정 경사를 유지하며 비스듬히 쌓여 있는데 이는 고식에 속하는
축성법으로 판단된다. 보통 판축법에서 확인되는 영정주나 판목, 횡장목 또는 종장목 등의 뚜렷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고, 각 토루의 축조 자체가 판축법에 의해 수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러한 방식은 중국의 신석기시대 이래 토루 축조방식에서 다수 관찰되기 때문에, 한국 토성
역시 초기에는 중국의 초기 토성과 같이 비스듬하게 성토한 방법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조사내용에서 드러난 여러 가지 사실들은 풍납토성의 축조연대가 삼국시대의
발달된 산성보다 다소 앞서는 원인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가 한성백제시대 초기라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의 고대 도성인
낙랑토성(樂浪土城)이나 고구려국내성(國內城) 등에 비견된다. 우선 한강에 직접 연해 있는 풍납
토성의 입지조건은 각기 대동강과 압록강에 연해 있는 위 도성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한 주변에
그와 관련된 고분군과 요새로서의 산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등도 초기 도성의 조건에 부합됨
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3세
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 완료되었다는 사실은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지난 1997년 1월부터 11월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한 토성 안쪽 풍납 현대
아파트 건축 예정지에서 나온 목탄 6점을 비롯해 1999년 역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토성 성
벽 출토 목탄 및 목재 3점, 1999년부터 2000년 5월까지 한신대학교에서 발굴한 토성 안쪽 경당연립
아파트 재건축부지 출토 목탄 3점에 대해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들 12개 시료는 서기 전
후를 중심으로 그 중심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 B.C. 199년으로 나왔으며 가장 늦은 것은 A.D. 231년
으로 나왔다. 이는 풍납토성이 서기 전후에 축조에 들어가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는 축조가 끝났음
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평가된다.
출처 :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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