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 : 사적 제101호
위치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삼전도비 :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비로,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비신의 앞뒷면에 몽골, 만주, 한자 이렇게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
은 근래 비를 다시 세울 때 새로 만든 것이며, 뒤에 보이는 거북받침이 원래의 것이다.
인조 17년(1639) 12월 8일(음력) 건립된 비로서 전체의 높이 5.7m, 비신의 높이 3.95m, 폭 1.4m이며,
제액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화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뒤에 청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 정부는 명의 군사 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
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루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소위 정묘호란). 조선이 청과 화약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인조 14년(1636)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에 대해 칭신할 것을 강요함에
이르러 마침내 양국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해 12월 청의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
어왔다(소위 병자호란). 인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과 대치했는데, 이듬해 1월 하순
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한 비축한 식량도 바닥이 나자 50여 일간의 농성 끝에 부득
이 1월 30일 청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에 나아가 청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의 태종은 조선 정부에 대해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
도록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장유·조희일 등이 지은 글을 청에 보냈던바 모두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인조의 특명으로 이경석이 지은 글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비석에 새기
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조에서는 삼전도의 제단터에 제단을 높고 크게 증축한 다음 비석을 세웠는데, 글씨
는 서예가로 이름 높던 오준이 썼고, 전자로 된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액은 여이징이 썼다.
이처럼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대해 항복하게 된 경위와 더불어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예찬
한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한편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뒤쪽에
는 한문으로 씌어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 연구의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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