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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길상사의 가을/삼각산 길상사/길상사 진영각

김 만성 2017. 11. 8. 17:33

길상사 / 길상사의 가을 / 삼각산 길상사 / 진영각

탐방일 : 2017년 11월 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번지


"길상사"

1987년 공덕주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님이 법정스님께 음식점이던

대원각을 불도량으로 2월 14일 만들어 주시길 청하여,

1995년 법정스님이 그뜻을 받아들이셔서 6월 13일 대한 조계종

송광사말사 “대법사” 로 등록을 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을 하였다고 한다.


"길상화"

길상화(吉祥華) 김영한은 (1916~1999) 일제치하,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성장하다. 16세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전통 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 하였다.

한때는 시인 백석 으로부터 자야 라는 아명으로 불리웠던 그녀는

분단조국의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학교를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편의 수필과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이름) (하규일

선생약전) (내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내기도 했다.

일찍이 그녀는 바위사이에 골짜기에 맑은물이 흐르는 배밭골을

사들여 한식당을 운영했는데, 이곳이 국내3대 요정의 하나 었던

대원각이 되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 를 읽고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한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 억

이넘는 대원각을 시주 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후 10여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주시기를 거듭청하여

결국 1995년 그뜻을 이루게 된다.




↑ "일주문"

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갈 때 가장먼저 통과하는 문이다.

최소한 네 개의 기둥이서야 일정한 면적을 가지는 건물이 이루어 지지만

안팎이 없는 두 개의 기둥만으로 세워진 문이라서 일주문(一柱問) 이라

불린다. 이문을 들어서면 사바세계에서 피안인 열반의 세계로 또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 간다는 뜻이다.

삼각산 길상사 라는 현판이 눈에뛴다.


↑ 일주문을 들어서자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고, 단풍사이로

극락전이 보인다.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면 극락전 마당이다.



입구에 길상사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 정랑(해우소) 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그리고 단풍이 아름답다.


↑ ↓ "극락전"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

다른절에서는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 길상사 "범종각"

김영한 여사는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1997년 12월 14일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만 받고

절터와 전각을 모두 보시하고 길상사가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기를 바랬다.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며

대원각 시절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던 팔각정이 있던 자리에 범종각이

세워지게 되었다.



↑ 김영한 여사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 세워진 "공덕비"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 그저 염주 하나와 “길상화 (吉祥華)” 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평의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수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의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많은 그녀의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후 그녀의 유골은 49재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7일에는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 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지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다.


김영한金英韓(1916-1999) :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열여섯 살 때,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1936년 항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白石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김씨는 지난 1951년 서울 성북동 청암장을 인수해 '대원각'으로 개명,

국내 3대 요정의 하나로 키워냈다.

과거 고급 요정의 대명사였던 서울 성북동 대원각(당시 1000억원을 호가)

을 법정스님에게 조건없이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로 변신케 했다.

그 사람 내게로 오네 119~121쪽 / 우리글/2004



↑ 법정스님의 "진영각"

법정스님(1932년 음력 10월 8일~2010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54년에 승려인 효봉의 제자로 출가 하였고, 1971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에 서울시 성북구 성북 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하였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소유의 의미입니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진영각에는 법정스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 진영각 내부 법정스님의 초상화와 평소 쓰시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법정스님이 쓰시던 의자


↑ 법정스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곳 (87권)


↑ 법정스님의 유골을 모신곳.

송광사 불일암과 함께 길상사 진영각 뜰 안에도 법정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 "관음보살상"

2000년 4월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씨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다.


↑ "길상7층보탑"

이 탑은 길상사를 보시한 길상화 김영한 여사와 법정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무상으로 기증했다.


↑ ↓ 길상사 주변 나무들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김영한 여사가 22살 한참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울 때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평생의 연인 백석(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한 인재이자 촉망받던 시인)을 만나 둘은 첫눈에 반했다.

아니 백석이 그녀에게 푹 빠졌다.

"이제부터 당신은 평생 나의 마누라야! " 스물둘의 진향에게 굳게 약속했다.

기생 진향에겐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백석은 중국 전설속 여인의

이름을 따 그녀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혀 주었다.

서울에서 함께 한 2~3년간의 시간, 두 사람의 사랑은 날로 깊어졌다.

그러나 기생의 신분으로 부부가 될 수가 없었다.

부모의 반대를 이길 수 없었던 백석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자야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창창한 앞날에 짐이 되기는 싫었다.

백석은 자야를 설득하지 못한 채 만주로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연락이 끊어진 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길상사 홈페이지 http://kilsangsa.info/home/default_in.asp 참조


오늘 길상사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