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다리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살곶이 앞에 있다 하여 살곶이다리, 또는 살꽂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후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혀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손바닥처럼 판판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 맑게 갠 날 따뜻한 바람이 사람을 훈훈케 하네.
아침에 푸른 적삼 잡히어 술을 사 가지고 삼삼오오 벗을 지어 봄놀이를 나가서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술잔을 속속히 돌리다보니, 고래처럼 마셔대다 술병은 쉬 말라버리네.
밝은 달밤에 준마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옥피리 소리 잦아들 제 살구꽃은 떨어지네.
- 서거정, <전교심방(箭郊尋芳)>
*심방(尋芳)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한다는 뜻이다.
곡수유상(曲水流觴)은 술잔을 물 위에 띄우고 노니는 모습이다. 봄날 흐드러지게 마시고 취해서 돌아가는
취객의 풍류를 노래하고 있다. 그들이 실컷 취하게 마신 곳이 바로 살곶이벌(뚝섬)이다.
이 살곶이벌에는 전곶교(살곶이 다리)라는 다리가 있다. 조선 시대 다리는 대개 짧다. 하지만 이 다리는
조선 시대 건축한 돌다리 가운데 가장 길다. 이 장석판교(長石板橋)에 쓰인 이 크고 웅장한 돌들을
어떻게 옮겼을지 궁금하다. 조선의 다른 돌다리들은 창덕궁 금천교처럼 대부분 짧으며 웅장함보다는
아름다움에 치중한 모습이다. 하지만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수돼 한강으로 흘러드는 개울 위에 만든 이
살곶이 다리는 꽤 길고 다리에 얽힌 사연 또한 흥미롭다.
이 다리가 놓인 살곶이벌에는 권력을 놓고 부자가 벌인 살벌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함흥에 오랫동안 칩거하던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다 살곶이벌로 마중을 나온 아들 태종 이방원을
발견하고는 화가 치밀어 화살을 쏘았는데, 이방원이 급히 피하자 화살이 차일 기둥에 꽂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의 살곶이벌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 태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태조가 보고는 노한 얼굴빛으로 가지고 있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려할 때에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들어 헌수할 때에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 방망이를 찾아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살곶이벌은 교통의 요지기도 하다. 흥인지문이나 광희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를 지나 강원도로
가는 길이 있고 송파나루를 건너 충주로 나갈 수도 있으며 헌릉과 인릉으로 가는 능행길이기도 하다.
또한 나룻배를 타면 선릉과 정릉으로 갈 수도 있다. 또한 봉은사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태종은 동교에서 매사냥을 한 뒤 대산 아래 새로 지은 궁의 낙성식에 참가했는데 실록은 이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상왕(태종)은 노상왕(정종)과 더불어 동쪽 교외에 나아가 매사냥을 하는데, 임금도 따라가 드디어
대산의 신정(新亭)에서 잔치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대산은 살곶이벌의 동쪽에 있어 한강에 다다르고, 형상이 시루를 엎어 놓은 듯하여 혹은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상왕은 지난겨울부터 그 아래에 궁을 건축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게 하여,
이제야 낙성식을 하므로, 박은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게 하니, 박은은 낙천(樂天)으로 명명할 것을 주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419년 2월 21일
태종이 궁궐을 건축하고 정자까지 만들 정도로 살곶이벌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교통의 요지답지 않게 비만 오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 상왕(태종)이 낙천정으로 가는데, 살곶이 냇물이 불어 넘쳐서, 배로 건너갔다가 날이 저문 뒤에 환궁하였다.
- 《세종실록》, 1419년 7월 4일
이동에 불편함을 느낀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과 당대 최고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직접
살곶천(箭串川)에 다리를 놓으라 명했다. 하지만 공사 시작 보름 만에 공사를 중단하고 만다.
잦은 토목공사 때문에 민심이 이반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렇게 공사가 중단된 다리는 66년이 지난 성종 14년에야 완공된다. 1486년 승려들이 동원돼 돌 1만 개가
놓였고 드디어 조선에서 가장 길고 튼튼한 돌다리가 건설된다.
성종은 승려들이 정성 들여 쌓은 다리를 보며 "스님들이 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제반교(濟磐橋)라 부를 것을 명한다"라고 지시했지만 부르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들
마음이다. 이름은 이내 살곶이 다리로 돌아왔다.
이상 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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