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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사진/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청량당

김 만성 2013. 11. 25. 17:52

 

○ 탐방일 : 2013년 11월 25일

○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 수어장대(守禦將臺)

 

↑ 수어장대 (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

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

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망루(無妄樓)

 

 

 

 

↓ 매바위

지금으로부터 3백 수십 년전, 조선 인조왕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 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은 부하의 이인고에게, 북쪽은 중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키었다.

 

이인고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 싶이 몰두하였다. 그러는 중에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의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러하였지만 공사를 준공하기에는 자금은 부족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인고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되어,

 "이인고는 사리 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벽암의 터무니 없이 헐뜯는 말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이것을 믿게 되어 불운하게도 그는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신이 죽기는 합니다마는 신이 죽은 뒤에는 그 진부를

 알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는 이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그러자 뻔적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인고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피가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이인고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여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관가에서는 실지 조사를 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 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인고가 분담하여 쌓은 성은 금성 철벽같고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야 안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수어장대 근처에다 사당을 세워「청량당」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인고 부인 송씨도 역시 남편 못지 않게 충렬한 부인이었다.

남편이 축성비 부족으로 낮과 밤 고심하는 것을 보고는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멀리 여러 고을을 돌아

다녀서 기부금을 받아 그 축성비를 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표연히 집을 나선지 여러 달만에 많은

 액수의 기부금을 얻어서 이것을 배에 싣고 세밭나루(삼전도)에 다달았을 때, 뜻밖에도 남편이 죽었다는

 슬픈 부고를 접하자, 통분한 나머지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또한 가상하게 여겨 그 강가 언덕 위에 사당을 세워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고 한다.(펌글)

 

 

↓ 청량당 (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모시고 있는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훗날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 뒤에 이회가 쌓은 남쪽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 정면에 이회의 영정(초상화)가 있고 그 양옆으로 처첩(부인과 소실)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발췌)

 

 

 

↓ 그리고 경내에 이승만대통령의 기념식수및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이 있다,


 

 

 

 

↓ 수어장대 주변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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