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여행산행 / 고성 천년고찰 건봉사
주소 : 강원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여행일 : 2021 년 9 월 19 일
찾아가는 길 : 승용차 이용
금강산 천년고찰 고성 건봉사
신라시대 법흥왕 7년(서기 520년)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하였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만일회의 시초이다.
그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사찰을 중수(重修)하여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하였는데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사찰을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라고 개칭하였다. 1464년(세조 10)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통도사에서 가져간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12과를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며 구한말 개화사상과 신문화교육을 위해 봉명학원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군 5,8,9사단, 미군 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건봉산 지역 전투로 사찰의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으나 1994년 이후 점차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옛 절터와 대웅전, 불이문(강원 문화재자료 35), 9층탑을 비롯한 7기의 탑, 48기의 부도(浮屠), 31기의 비석이 있다.
출처 : 백과사전
금강산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절 건봉사, 고성8경중 1경인 건봉사를 향해 출발을 한다. 추석 명절 이틀 전이라 그런지 서울 양양 고속도로와 국도는 평상시 보다는 차들이 많은 것 같다. 올림픽 대로에서 고속도로를 진입하는 곳부터 춘천까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춘천을 지나면서 부터는 평상시와 같은 속도로 달릴 수가 있다.
건봉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오니 오른쪽으로는 매점이 있고 왼쪽으로는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사명대사 기적비 라는 비석이 서있다.
기적비(紀跡碑)라 함은 '사적을 적은 비'로 사적비(事跡碑)와 비슷한 말로 '역사적, 사실적인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한 비'라 할 수 있는데, 사명당(四溟堂)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이다.
1544년(중종39)에 태어나서 1610년 입적을 하였는데, 1559년 김천의 직지사로 출가를 하고 1581년 보현사의 휴정 서산대사 를 찾아가 수행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휴정과 함께 승병으로 참여하여 평양성 탈환작전에 가담하였고,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604년 왜와의 담판을 위해 조정의 사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1605년 왜국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건봉사는 독립운동가 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선생의 당호인 만해 를 받은 곳이라고도 전해지며,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 관련 많은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본당인 건봉사를 가려면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로 불이문을 지나게 되어있는데,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봉사의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 자료 35호 지정이 되어있으며, 다른 절의 불이문과 달리 아래 부분은 돌기둥으로 되어있다.
불이문은 1920년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건물구조는 팔작지붕에 익공(翼工)계이다. 지붕의 네 모퉁이에 용두(龍頭)가 있으며, 정면 처마 밑에는 ‘불이문(不二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글씨는 큰 글자를 특히 잘 썼던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 (金圭鎭)이 썼다
건봉사 불이문 오른쪽 아래 개울에는 개울을 건널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는데 원목으로 만든 다라라고 하고 다리 이름은 연화교라고 하는데 천년 고찰과 어울리는 다리 같아서 건너보고 다시 건너와 위로 올라간다.
건봉사 대웅전을 가려면 능파교 라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능파교 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경내 불이문 옆의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에 의하면 이 다리가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1745)에 대홍수로 붕괴되어 영조 25년(1749)에 중수하였고, 고종 17년(1880)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山映樓)를 고쳐 쌓는데 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비교적 크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다리로,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갖추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능파교를 건너 봉서루 라는 누각을 지나야 대웅전이 나오는데 봉서루 는 2층으로 되어있으며, 2층 누각에는 건봉사의
100년 전 사진 들이 전시되어 있다.
봉서루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건봉사의 중심인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위엄을 갖춘 목조 건물로서
扁額(편액)은 마니산인(摩尼山人) 전정우(全正雨 1949~) 선생 글씨이며, 전정우(全正雨) 선생은 1949년 강화출신으로 아호는 심은(心隱), 마니산인(摩尼山人), 춘사(春史), 강화서인(江華書人)이며 서예가, 전각가이며, 심은 미술관 관장이라고 한다.
불단으로는 세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가운데 본존 석가모니불, 우보처 보현보살, 좌보처 문수보살 상이 배치되어있다.
건봉사 대웅전을 돌아보고 다시 능파교 를 건너와 왼쪽으로 올라가면 동종각 과 극락전이 나온다. 극락전은 건립한지가 오래되지 않은 새 건물인 듯하다.
극락전을 지나 조금 올라오면 적멸보궁 (寂滅寶宮) 이 나오는데,
적멸보궁 (寂滅寶宮) 이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았다.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오대산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원에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통상 이를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이라한다.
이 밖에 건봉사, 용연사, 도리사, 대견사, 다솔사, 장안사, 법계사 등 많은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이란 많은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이며 보궁은 보배 같은 궁전이란 뜻이다. 즉 적멸보궁 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수미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는 모시지 않는다. 법당 바깥이나 뒤쪽에 사리탑을 봉안 했거나 계단 (戒壇) 이 있다. -지식in-
금강산 건봉사와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입니다.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월정사,법흥사,정암사,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가버렸습니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도사 사리를 되찾아오게 됩니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습니다.(석가여래치상탑비)
이것은 귀중한 진신사리가 다시 약탈될 경우를 우려해 나누어 분장한 것입니다.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입니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어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했습니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당은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습니다.
하지만 6월 하순부터 도굴꾼들의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건봉사는 되찾은 부처님 진신사리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할만 합니다. 사리4과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셈입니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 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전해집니다.
출처: https://www.geonbongsa.org/category/건봉사이야기/부처님치아사리 [건봉사]
적멸보궁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또 다른 여행지를 찾아 자동차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한다.
여행을 겸해 찾아간 고성 건봉사는 처음 방문한 절이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었으며, 각종 문화재를 비롯하여 수령 300년의 소나무가 있고, 불이문 옆 수령 500년 된 팽나무는 한국 전쟁 때 건봉사 모두가 불탔을 때 불이문을 지켜 줘서 불이문만이 불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보호수도 있다, 고성 건봉사는 볼거리도 많은 곳으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면 더 좋은 곳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고성 건봉사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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