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일 : 2015년 12월 13일 (블러그 올린날 : 2016,1,20)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능내리)
* 다산 정약용의 마지막 길, 마재(마현부락)의 다산유적지 *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마재(마현부락)는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산소가 위치해 있으며, 아울러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터가 있는 곳이다. 마재는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 마재에서 200m거리에 있는 다산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져 있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척에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 대감 마을도 있다.
* 신앙과 유배, 실학 사상으로 정리되는 다산의 삶 *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 이들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라는 것을 보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
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를 다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본래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
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_ 백과사전 발췌 _
↓ 정약용상
정약용
동의어 귀농(歸農), 미용(美庸),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문도(文度) 다른 표기 언어 丁若鏞
정약용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
(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양반이며 그 이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했지만, 그의 집안은 당시로서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 다산유적지 사진들
목민심서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1818년에 완성되었다.
〈여유당전서〉 권16~29에 실려 있다.
내용은 관리의 부임부터 해임까지 전 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각 조항으로 정하고 정약용 자신의 견식과 진보적 견해를 피력해놓은 것이다.
부임·율기·봉공·애민·이전·호전·예전·병전·공전·진황·해관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을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각조의 서두에는 수령이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을 간단명료하게
지적했고, 그다음에는 설정된 규범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과 역사적 연원에 대한 분석을 했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의 실정을 규탄하면서 수령의
실천윤리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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