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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서울지하철 스템프투어 5코스,삼전도비 (과거여행) /2015,8,16

김 만성 2015. 9. 4. 16:00

2015 서울지하철 스템프투어 5코스, (과거여행) /2015,8,16 

탐방일 : 2015,8,16


↓ 삼전도비



삼전도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결국 1637년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항복 의식으로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기를 반복하는 ‘삼배구고두’를 했습니다.
청나라 태종은 항복 의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공덕을 새긴 삼전도비라는 비석을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하였습니다. 삼전도비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의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어졌습니다. 비석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유적이지만 비석의 앞면에는 몽골 글자, 오른쪽에는 만주 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비문이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상  백과사전에서 인용....


* 참고로  요즘 MBC 월,화 드라마 화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8월 31일과 9월 1일 방송분에보면

   위의 역사를 알수 있다.


서울지하철 스템프투어 12코스 경리단길 과 남산식물원을 갔다가

무더위를 못이겨 지하철을 타고 5코스에 있는 삼전도비를 찾아보기로 했다.

잠실역 3번출구로 나와 삼전도비가 있는 석촌호수쪽을 향했다. 롯데월드 건너편에는

제2롯데월드 공사가 한창이고 도심은 붐비고 있었다.








↓ 삼전도비






















↓ 석촌호수


↓ 삼전도비를 돌아보고  송파구청옆에 칠지도 모형을 찍으러 갔다.

   7월20일 지하철스템프투어 10코스구간인 한성백제박물관에 갔다가 휴관일이라서

   못보고간 칠지도를 모형사진으로 라도 남겨두려는 마음에...


칠지도

일본 나라 현[奈良縣] 텐리 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는 74.9㎝로서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0여 글자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칠지도의 명문은 이소노가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칼의 제작

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고대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한 근거로까지 이용되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는 369년

(근초고왕 24)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태화(泰和) 4년 5월 16일 병오(丙午) 정양(正陽)에

 100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모든 병해를 물리칠 수 있으며 편안히 후왕에게 나누어

 마땅하다. (아무개가 이 칼을) 제작했다"라는 것과 "선세(先世)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백제의 우위를 명백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는 백제왕의 '말'을 극존칭인 '성음'이라고 표현한 데 반하여 상대방인 왜왕에게는 경어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명령형의 하행문서 양식으로

되어 있어 이같은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부월(斧鉞)이나 도검(刀劍)의

 하사는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할 때,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

동기는 왜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일종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양국간의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는 백제왕이 그 권력범위를 확대하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다. 한편 칠지도의

형상은 단군신화에 보이는 신단수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도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제왕권이

 하늘과 연결되는 신성성, 즉 초월적인 권위 및 사방천하관(四方天下觀)이 반영되어 있으며 천손을

자처한 백제왕의 역할과 권위를 과시하는 주술적 성격의 성구(聖具)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부여 군수리 절터의 탑기둥 구멍 밑에서 출토된 바 있어 주목된다.

이상 백과사전에서 인용


↓ 칠지도 모형도 (송파구청 옆)






서울지하철 스템프투어 5코스에 있는 삼전도비와, 칠지도 모형도를 돌아보고 잠실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를 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또한가지 공부를 하고 돌아온기분은 참으로 흐믓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