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여행 사진/남한산성

남한산성(남문) / 2014,9,7

김 만성 2014. 9. 18. 16:01

탐방일 : 2014년 9월 7일

○ 소재지 : 경기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다시 생각하는 남한산성

 

↓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

 

 

성문(城門)은 성을 드나드는 주출입구(主出入口)이다. 성문의 숫자나 위치는 성곽의 입지여건

(立地與件)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동서남북 사면에 하나씩 4대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

(一般的)이었다. 성문을 많이 둘 경우 출입에 편리한 측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성문의 수비와

방어에 어려움이 있으며, 아무리 큰 성이라도 주요 간선도로로 가는 데는 각 방향에 따른 하나의

출입구만으로도 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한산성처럼 지형여건상 성문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경우에는 암문을 설치하여 출입기능을 대신하도록 하였다.남한산성의 성문은

모두 4개이다. 동문은 산성의 남동쪽에 있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매우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의 위치와 형태가 선조(宣祖) 때에 이미 보수하였다고 하는 그 동문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인조(仁祖) 2년1624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正祖) 3년1779 성곽보수시에 성문

도 보수하였다. 이 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이라 하였다. 이 문을 좌익문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

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4대문 중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남문인 지화문

(至和門) 하나뿐이다.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平女墻)이며 총안

(銃眼)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 좌측의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

부도 사선(斜線)을 이루도록 하였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다른 문에

비해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어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제11암문으로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 서남쪽 부

분은 1973년 남한산성-광지원 간 8m 도로 확장공사로 성벽이 잘려 있고, 동문 남서쪽 60m 지점

에는 성 내의 주배수구였던 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편으로 물길을 우회시켜 배수로(排水路)의

 기능을 상실하였다.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7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을 져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여갔다고 한다.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 문이 있었다는 선조대의 기

록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칭하였다.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으로

설치하였고,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문루는 단층(單層)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八作)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에 치미(?尾)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椽燈天障)이며 기둥은 주심

포(柱心包)양식의 민흘림기둥이다.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

한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初築)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7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동문은 좌익문

(左翼門)이라 하였다.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통과하여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

(開口部)는 내외면이 반원형(半圓形)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

였다. 판문(板門)의 문짝에는 방형 철엽(鐵葉)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附着)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도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 측벽에는 장군목(將軍木)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 안쪽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

(部分的)으로 표면(表面)이 박락(剝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露出)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으며,

누의 천장은 연등천장에 일부에 우물천장을 병용하고 있다. 기둥양식은 주심포에 2출목(二出目)

익공식(翼工式) 이다.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

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花崗石)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柱礎石)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

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