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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사(북한산)/2014,9,9

김 만성 2014. 9. 13. 15:13

탐방일 : 2014년 9월 9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 동쪽 중턱에 있는 절.

 

↓ 승가사 대웅전

 

승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했으며

당 고종연간(高宗年間:649~683) 연간에 장안(長安)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며

생불(生佛)이라고 칭송되었던 승가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절이름을 승가사라 했다고 한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고, 1090년(선종 7)에는 영현(領賢)이 중수했다.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로 일부 당우가 다시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57년 도명(道明)이 대웅전·영산전·약사전을 중창했으며,

그뒤를 이어 상륜(相侖)이 불사를 계속하여 산신각·동종각·대방·요사채 등이 있다.

승가굴 안에는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僧伽寺石造僧伽大師坐像:보물 제1000호)이 있다.

* 백과사전 인용

 

삼천사를 지나, 삼천사계곡 그리고 사모바위를 탐방하고,

구기탐방 안내소 방향으로 하산을 하가로 했다.

사모바위에서 2~300m 하산하면 좌측편우로 승가사 라는 절이 있는데, 올라가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이렇게 높은산에 기암괘석 위로 어런 건축물이 있다는게 신비롭다.

 

↓ 표지석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청운교 계단길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호국보탑(護國寶塔)(민족통일호국보탑)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 http://pynce43.tistory.com/189  (블러그 인용글)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포대화상(布袋和尙)

 

 

↓ 대웅전

 

 

 

 

 

 

 

 

 

 

↓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보물 제1000호. 높이 불상 76cm, 광배 130cm. 승가굴은 삼국시대부 터 여러 승려들이 수도했던 석굴로

유명하며 그 안에 주존으로 안치되어 있는 상은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법을 전수하여 이름을

떨친 승가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광배 뒷면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1024년(현종 15)에 지광 등이 발원하여 승려 광유(光儒) 등이 만들었다고

한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등신대 크기의 좌상이나 대좌는 나중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넓은 편으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이마에 주름살까지 표현했으나

전체적으로 호분(胡粉)이 두꺼워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넓고 편평한 가슴 위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주름은 굵고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상체가 길고 유난히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 점은 당시 고려 초기 철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고 있으나 왼손은 소맷자락 속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는다.

광배는 상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으로 두광과 신광이 합쳐져 마치 배 모양을 이루고 있는 주형광배(舟形光背)

이다. 두광 안에는 연화무늬를 새기고 그 주위에 당초무늬와 모란무늬를 돌렸으며 신광에는 당초무늬와

보상화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무늬를 부조했다.

이 상은 전체적인 비례감이나 세부표현, 옷주름의 처리 등에서 고려 초기 조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초상조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하늘도 푸르고, 마음도 푸르니 오늘은 기분이 상쾌하다.

승가사를 돌아보고, 구기탐방 지원센타를 지나 구기터널 입구까지 오니,

어느덧 저녁때가 되어간다, 구기터널 앞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 회관 앞에서 내려 광화문 광장을 지나 전철역으로 향했다,,,

이렇게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