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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이라면 껌뻑 죽는 미국인

김 만성 2007. 4. 14. 14:35

2007년 4월 14일 (토) 03:32   조선일보

 

마릴린 먼로를 우상으로 삼았던 관능적인 백금발의 여성(로이터)” “부담스러울 정도로 육감적이고 거의 초자연적인 금발(뉴욕타임스)”

지난 2월 모델 애나 니콜 스미스의 돌연사를 놓고 전 미국 언론이 떠들썩할 때, 권위 있는 일간지에서부터 타블로이드지 기사까지 빠지지 않던 말이 바로 ‘금발(blonde)’이라는 단어다. 그녀의 부고 기사에도 ‘금발이었다’는 말이 꼭 들어간다. 마치 머리카락 색이 그녀의 중요한 이력이라도 되는 듯이.

초다양성(Super-diversity)의 시대인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은 여전히 금발에 열광한다. 아니, 최소한 ‘특별대우’한다. 갈색머리인 사람에 대해 묘사할 때는 키나 직업을 먼저 언급해도, 금발인 경우엔 머리색 얘기부터 나온다. 밝은 백금발일 경우엔 특히 더 그렇다. 미국인에게 “그웬 스테파니가 누구냐”고 물어 보라. 열에 아홉은 “왜 있잖아, 금발이고…”라고 운을 뗄 것이다.

연예인만 머리색이 강조되는 게 아니다. ‘리크게이트’로 CIA 요원직을 그만둔 발레리 플레임에 대해서도 ‘금발의 비밀요원’ ‘금발의 야망(blonde ambition)’ 등의 표현이 기사에 등장한다. 마돈나의 콘서트 제목이기도 했던 ‘금발의 야망’은 여성들이 성공하기 위해 금발로 염색을 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말. 금발이 그만큼 사는 데 유리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일 때 얘기지만, 따져 보면 현대사회에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은 직업은 별로 없다. 힐러리 클린턴이 법대 시절의 촌스러운 ‘공부벌레’ 이미지를 씻어내고 대중의 호감도를 높이는 데도 금발로 염색한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 있다. CBS뉴스 단독 앵커로 발탁된 케이티 쿠릭도 금발에 푸른 눈이라서 득을 봤다는 뒷말이 오갔다. 기상캐스터, 웨이트리스, 심지어 학교 치어리더가 되는 데도 금발이 유리하다. 대학 스포츠 경기에선 간혹 치어리더 10여명이 전부 금발인 경우도 볼 수 있다. 아니 금발 아니면 응원도 못하나? 도대체 금발이 뭐길래?






# 미디어가 구축한 블론드 신화

오늘날 현대인들이 금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갖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 금발 배우가 섹시하고 매력적인 역할을 맡는 영화나 드라마, 광고 등을 보면서 대중은 무의식 속에 ‘금발=섹시’란 공식에 의해 세뇌돼 버린 것이다.

금발의 에로티시즘을 각인시킨 초창기 인물로는 30년대 영화배우 진 할로우가 꼽힌다. 요염한 금발 악녀 역을 주로 연기한 할로우는 대공황으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 신선한 자극을 안겼고, 그녀가 나온 영화 제목에서 ‘플래티넘 블론드(밝은 금발)’ ‘블론드 밤셸(섹시한 금발 미인)’ 등의 유행어가 탄생했다. 이어 마릴린 먼로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뜨거운 것이 좋아’ 등에서 백치미를 녹여낸 관능미로 1950년대 전후 미국 사회를 위로하면서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이미지가 대중문화 속에 범람하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삶을 의문의 죽음으로 마감한 먼로는 피플지, 플레이보이지에서 ‘20세기 최고의 섹시 미녀’로 선정됐고, 더불어 그녀의 금발머리도 역사적인 섹시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재미있는 점은 금발 미녀의 대명사인 먼로가 원래는 금발이 아니라는 사실. 그녀의 우상이었던 진 할로우도, 먼로의 뒤를 잇는 섹스 심벌 파멜라 앤더슨도, 마돈나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사실은 염색한 머리다. 미국 내 천연금발은 스무 명에 한 명 정도지만, 금발로 염색해 본 사람은 세 명에 한 명꼴. 염색약 한 통이면 얻을 수 있는 것을 갖고 온 국민이 열광하는 셈이다.






# 할리우드에는 머리 색 공식이 있다

사실상 영화나 광고가 금발 배우를 선호한 첫 번째 이유는 금발이 다른 머리 색보다 더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 높은 시선집중 효과는 과거 숱한 상업 광고들이 금발 미인의 손에 상품을 들려 사진을 찍는 계기가 됐다. 금발은 관객 눈에도 띈다. 기네스 팰트로, 캐머론 디아즈, 샤론 스톤, 리즈 위더스푼, 키어스틴 던스트, 우마 서먼이 평범한 갈색 머리였다고 상상해 보자. 지금처럼 많은 영화 주인공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까? 염색을 하지 않는 한 ‘원초적 본능’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금발이 너무해’ 등의 주연을 맡긴 힘들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금발에 푸른 눈’은 전형적인 백인 미녀의 대명사다. 파라 포셋에서 캐머런 디아즈까지 ‘미녀 삼총사’의 중심에는 항상 금발이 있었다. ‘클루리스’ ‘아메리칸 뷰티’ ‘퀸카로 살아남는 법’ 등에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인기 높고 도도한 여학생은 꼭 금발이다. 졸업파티 퀸이나 치어리더, 심지어 ‘킹콩’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도 금발이다. 신비감을 준다는 이유로 미스터리물의 희생자나 의문의 여인 역까지 금발이 차지하기 일쑤다. 한 염색약 광고가 유행시킨 ‘금발들이 더 재미있게 산다(Blondes have more fun)’는 말이 그래서 더 들어맞는다.

반면 소외 당하던 못난이가 인기녀로 거듭나는 소위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 중에는 금발이 드물다. 아무리 뿔테 안경을 씌우고 교정기를 붙여도 머리가 금발이면 사교적으로 보이기 때문. 물론 갈색머리나 빨간머리, 검은머리 미녀가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도 많다. 그러나 보통은 머리 색이 짙을수록 여성스럽기 보다는 터프하고 지적이거나 보수적인 성격으로 묘사된다. 원더우먼이나 라라 크로포드 같은 강인한 여전사, 지적인 커리어우먼은 대부분 검은 머리다. 아일랜드계에게 많은 빨간머리는 열정적이고 고집 센 성격으로 통한다. ‘섹스 앤더 시티’에서 섹시하고 사교적인 캐리와 사만다 역의 배우들은 금발로 염색을 한 반면, 보수적인 샬럿 역의 배우는 짙은 색 머리를 고수하고, 고집 세고 개성 강한 미란다 역은 원래 금발임에도 빨간머리로 염색을 한 데서 이 같은 ‘할리우드 머리색 공식’을 엿볼 수 있다.

USC의 타니아 모들레스키 교수(영문학)에 따르면 금발 신화가 유지되는 것은 “진실성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고정관념과 언어습관 때문”이다. 수세기에 걸쳐 성녀에서 섹스심벌로, 특권층으로 상징성의 변천을 겪어 온 금발이 또 어떤 의미를 추가하게 될지는 현대인들의 고정관념에 달려 있다.

[버클리(미 캘리포니아)=이자연기자 ach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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